살다보니 별별일 다 겪지만 아직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듣게되니 다소 황당한 생각이 들어서 몇자 남겨보려 한다.
<로봇 학대>라는 말이 대한민국 일간지에 등장해 화려하게 인터넷을 달구었다.
무슨 상황에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기자가 이런 단어를 구사하게 되었는지까지는 말할 가치가 없어서 논하고 싶지 않다. 너무 정치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단지 비정상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에 깊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다만 이런 단어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여 지려면, 적어도 <로봇>이 우리(여기서는 인간)이 인정하는 수준의 감성적 상태까지 도달한 ‘상대’라야 한다고 뚠자는 생각한다.
인간이 가축을 학대하는 경우에 예상되어지는 상대 가축이 고통을 느껴 눈물을 흘린다거나 비명을 지른다거나, 본능적인 도망이나 발버둥같은 움직임이 있다거나 하는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서의 기본적 생명 유지를 위한 몸부림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로봇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언론에 나온 바로 그 <로봇 학대>의 주인공인 로봇은 단순히 프로그래밍 되어있었으며 뒤집어도 일어나서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억 장치에 충격이 가해져 동작 불가 상태이거나 전원이 나간 경우 등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무조건 정해진 프로그램 논리대로 동작될 것이다.
일부 제한적인 판단, 예를들면 넘어진 상태이니 다시 일어나서 자세를 바로 잡자와 같은 본 목적 이외에는 부가되지 않은 자의적 판단은 불가하며, 기쁨이나 슬픔 공포 두려움 환희와 같은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생물학적 배고품 피로감 같은 것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테스트 목적으로 한번 거칠게 뒤집은 것이 아닌 그것보다 더 심하게 몽둥이로 패거나 총으로 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시대의 로봇에게 총을 쏘아 망가뜨리면, 재물손괴는 가능하나 살인죄가 될 수 없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언제쯤 로봇에게 심하게 대하면 <로봇 학대>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아이로봇>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는 윌 스미스와 한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이 로봇이 바로 자아를 느끼게 되면서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줄거리로 하는 영화다.
인공지능이 더욱 활성화 혹은 심도깊은 연구 개발이 이뤄져 자아를 느끼는 로봇이 나온다면 바로 그때부터 <로봇 학대>를 막기위해 노력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로봇이 더 강해져 오히려 로봇에게 인간들이 학살을 당할 상황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말이다.
뚠자가 자주 언급하는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커즈와일처럼 바로 로봇에게 인간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이 <로봇 학대>라는 말은 얼마나 부적절하게 선정된 단어인지를 알 수 있다.
아마 <학대>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리라.
더 웃기는 건 그에 동조한 고려대 교수라는 사람이다.
학자라면 상당한 지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러한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어설프게 동조하였다는 점이 말이다.
아직은 이 사회가 (미국을 포함해서) <로봇 학대>를 염려할 상황까지는 안 온듯하다.
1,2년내에 온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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