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명나라 초기에 정리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나관중이다. 소설 삼국지연희는 조선시대 중반 선조 2년때 기록에 나타난다. 기대승이라는 성리학자가 선주에게 상소를 올렸다.
"명나라의 소설 삼국지가 요즘 세상에 너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으니 풍속을 해칠까 염려가 된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선조 2년에 열풍이 불었다고 하니 혹시나 우리 이순신 장군께서도 읽으셨을까? 뚠자는 그 점이 너무 너무 궁금하다.
아무튼 그 당시의 광풍에 힘입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시호인 충무. 그런데 이 충무라는 시호를 1천년도 더 이전에 앞서 받은이가 중국에 있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이다.
우리 충무공 생전에 그리도 못마땅해 하며 목숨마저도 거두려했던 선조가 공께서 전사하신 이후 정신을 차렸는지 그래도 시호 하나는 제대로 붙여 주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충성스럽고 전무후무한 군사전략가로 칭송받는 제갈량과 같은 시호를 내렸으니 말이다.
공신의 품계에도 낮은 등급을 내린 선조가 마음도 삐딱하게 먹고 소설에나 나오는 인물의 시호나 가져라하는 마음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하자. 양심상 찔려서 시호만이라도 극진히 대접해 준것이라고 선조를 믿어보자.
아무튼 똑같은 시호를 받게된 중국의 5천년 역사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충무공 제갈량과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위대한 해군 제독 충무공 이순신. 이 두명의 충무공에 대해 간단한 비교를 해 보겠다.
먼저 우연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두분의 충무공은 모두 사망할 당시 향년 54세였다. 과업을 완수하지 못해 수명을 더 늘려보려 했으나 장수 위연이 망쳐 한을 품고 죽은 제갈량. 반대로 우리의 공께서는 마침내 왜적을 물리치고 본국으로 도망가는 적들을 쫒으며 여한 없는 해전을 마무리 지으며 장렬히 전사하셨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두 충무공은 육전과 수전을 가리지 않는 명장이었다. 대부분이 육지에서의 싸움인 중국은 제갈량을 통해 적벽이라는 바다급의 거대한 강을 통해 물을 기반으로 하는 전투 장면을 역대급으로 다루었다. 물안개와 10만개 화살. 물 멀미와 배를 연결하는 연환계. 그리고 화공.
우리의 충무공께서는 원래 육지에서 근무하셨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아마도 선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 사건이 녹둔도 사건일 것이다. 공께서는 무명시절에 두만강 인근의 녹둔도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대항하여 열심히 분전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숫적으로나 애초에 불리했기에 패해 후퇴하게 된다. 이에 그 지역을 총괄하던 상관은 충무공을 잡아 본인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했으나, 녹둔도의 군사적 상황을 아는 조정에서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을 하라 명한다. 얼마후 서애 선생의 도움을 받아 충무공께서는 수군에서 중책을 맡게되셨다. 그리고 그 공적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운 정도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두 충무공 모두 신기술을 전투에 적용하는 실험정신이 뛰어난 분들이었다. 중국 충무공은 목우와 유마, 연(kite) 등 중국의 모든 것은 제갈량에서 시작됐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기술과 아이디어 등을 선보였고, 우리의 총무공께서도 세계 최초의 철갑 전투선을 전투에 투입하셨다. 거북선은 임란이 터지기 직전에 건조가 되었으니, 그에 대한 훈련과 운용 그리고 실전에 투입하는 것등 모두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는 것이라 안전한 판옥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과감한 실험정신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두 충무공은 평소 부하 군사들을 훈련 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게 진법이란 전쟁에서 바로 써먹기 위해 군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전개되야 하는데, 두명의 충무공의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 진법을 주로 운용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제갈량의 팔진도, 우리나라에서는 충무공의 학익진이 대표적이다.
두 분 모두 불멸의 문장 가셨다. 중국 충무공은 군주인 유비가 죽은 후 위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며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그 유명한 '출사표'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의 충무공은 다양함에서 더욱 빛을 발하셨다. 그 전쟁 기간 동안 내내 하루하루 일기를 기록하시며 난중일기를 지으셨고, 그 와중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영웅적 시조까지 지으신다. 그리고 마지막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울컥하는 상소문마저 남기셨다. 아~ 정말 공께서는 뚠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십니다.
두 충무공은 멸사봉공의 자세로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며 결코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중국의 충무공의 황제의 자리를 취하라는 군주의 말을 물리쳤고, 우리 공께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업을 도모하자는 명나라 진린의 말을 거절했다.
또한 장수로서 최고의 명예라는 전장에서의 죽음을 두 분 다 몸소 실천하였다.
물론 두 분 다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셨다. 중국의 충무공은 천시와 지리를 넣어 전쟁에 응용한다라고 하는 전쟁의 기본적 부분을 잘 보이시며, 죽어서도 사마중달이 도망가게 할 정도이니 그 지략의 무궁함이 당대 최고이셨다. 하지만 우리 총무님께서는 어떠신가? 23전 23승. 무패로다. 전투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신다. 한산도에서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보여주시고, 명량에서는 죽음을 능가하는 지략과 기개로 그 불리한 싸움마자도 기적의 승리를 일궈놓으시니 진짜 말이 필요없는 경지인 것이다.
다른점을 하나 꼽으라면 중국의 충무공은 군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다시피 하였으나, 우리의 충무공은 군주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기와 질투를 받고 그 선물로 고문이라는 아주 지독한 선물까지도 받았다.
아무튼 두 충무공은 당대를 살았던 그 어떤 장수 장군들 보다도 레벨이 다른, 클래스가 다른 인물들이었던 것은 사실인것 같다. 감히 뚠자가 두분의 충무공을 존경하며 이렇게 비교 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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