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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보는 소설 중 한 분야인 판타지라는 장르가 있다. 요즘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묵향을 좋아한다. 32권까지 보고 중단인 상태다.ㅠㅠ

 

서양의 판타지라고 하면 쉽게 공감이 가지만 동양의 판타지는 왠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협이라는 장르로 접근을 하면 바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판타지(fantasy)라는 의미가 우리말로는 환상정도로 번역 될 것이다. 현실이 아닌 허상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술이나 마법이 난무하지 않더라도 현실 세계와는 거리가 먼 내공이나 혈도, 장풍 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무협소설도 판타지와 같은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뚠자가 실제 살면서 경험해보니 이 부분 역시 초반에는 동양쪽 판타지가 좀 더 우세했었는데 이제는 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서양쪽 판타지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뚠자는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무협지를 본격적으로 읽었다. 고교생 시절 맨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무협지 읽으며 낄낄대는 소리에 잠시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무사히 대학교 들어가고 나서 무협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시작은 구파일방을 중심으로 하는 만화방에서나 주로 빌려보는 수준 낮은 무협지로써 대부분의 내용은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림 내부에 정파와 사파 세력이 충돌하는 와중에 어느 무술인이 기이한 인연으로 약초 혹은 선배 고수의 내공 전수 등을 통해 내공이 증가하고, 아울러 고수의 특급 지도나 무술 비법서를 얻어 천하 제일 고수가 되고, 결국 세력 간의 충돌을 불식시켜 평화를 가져온다는 구조 말이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당시 홍콩의 작가인 김용의 작품을 읽게 되면서 쓰레기 수준의 무협지가 아닌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무협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 설산비호, 연성결 등 김용의 작품이라면 가리지 않고 접어들었으며 나중에는 실제로 김용이 쓰지도 않는 소설도 사서 읽었다.

 

당시(90년대)는 저작권법이 다소 약했던터라 마케팅 목적으로 김용의 이름을 달고 나온 소설이 있었다.

 

물론 작품의 수준이 김용 본인의 진품들과는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익숙한 주인공의 이름이나 무공 비급 혹은 무공 명칭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만족스러웠던 시간들 이었기 때문이다.

 

뚠자는 당시나 지금이나 김용을 신필(神筆)로 인정한다.

 

저급했던 무협지를 당당하게 문학의 반열로 올라 놓았음은 물론이며 작품마다 유교, 불교, 도교 등이 아주 깊이 있게 스며들어 작품에 동양적 철학 배려가 있었다. 이는 중국인이 아니더라도 중국인의 사상적 원류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된다.

 

아울러 실존했던 인물이나 실제 역사적 사건을 소설 속에 투사하여 자칫 칼부림만 난무하다 끝날 것 같은 소설에 사실적 요소를 가미해 재미를 더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용의 작품들은 만화, 비디오, 영화, 드라마, 게임 등으로 제작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상황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점이 바로 문제가 된다.

 

신필 김용이 죽은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무협물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김용의 인기 작품을 리메이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천도룡기는 거의 매년, 신조협려는 거의 격년(2), 사조영웅전 3년마다 리메이크작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몇 년도작인지는 몰라도 뚠자가 본 양과는 유덕화가, 장무기는 양조위가 배역을 맡았었다.

 

의천도룡기에 출연했던 조민역의 여배우들만 모아서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몇 년도 조민, 몇 년도 조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처럼 무협물의 발전이 정체된 근본적인 원인을 뚠자는 무협이 가지는 내부 속성에서 두 가지 원인을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시대나 시간적 창작 공간의 제한이다. 아무래도 소림이나 아미파 같은 구파일방이 배경으로서 내용에서 빠지기도 어려우며, 현시점의 무협물이 작품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쉽게 돈 벌려고 코믹물로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이소룡-성룡-이연걸로 이어지는 맥이 끊겨버린 것이다.

 

두 번째는 무협이라는 장르 자체가 주인공의 발전에 한계를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소비자들은 주인공들의 성장에 열광한다. 1편의 성장을 보고 나면 2편에선 더 강해져야 한다. 해리포터나 아이언맨을 보면 금방 알수 있다.

 

그러나 맨몸 수련에 장풍이나 창, 칼등으로 얼마나 소비자의 공감을 이끌어 낼까?

 

하지만 무협물의 대항마인 서양식 히어로들은 어떤가? 처음엔 단순한 쇳덩이 갑옷으로 시작했으나 아크 원자로를 가슴에 품고, 실시간으로 인공지능 컴퓨터의 조언을 들으며, 나노소재로 이루어진 슈트에 강력한 레이저 무기를 날아다니면서 발사한다. 거기다 마지막엔 지구를 구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길까지 터준다.

 

이들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힘을 두려워하며 엘프의 땅을 지나 힘겨운 모험을 했다.

 

나무 괴물과 동물 괴물들이 싸우는 혼란을 틈타 반지를 화산 용암에 던지면 끝나는 등의 시대적, 시간적 한계에도 갇혀있었다.

 

그러나 다음의 작가는 마술, 마법을 현대적 시대와 코드를 맞춘 <해리포터>를 내놓는 발전을 한다.

 

이렇게 거듭나면서 현대적 시대상과 코드를 연동하더니 현재 마블 전성 시대에서는 오히려 현실을 앞서나가는 세계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런 상황을 보면 확실히 역사적 혹은 인류가 보여준 궤적이 오버랩 된다.

 

인구수 많은 중국이 초반에는 치고 나가지만 결국 발전시키는 것은 서양 아닌가하는, 서양 우월주의 시각이 되는 건 뚠자 만의 착각인가?

 

아직도 <삼국지> 제갈량이나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라는 이름을 들으면 찬란했던 청춘시절을 떠오르는 뚠자로서는 더 새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듯이 보이는 무협 분야가 안타까워서 한 마디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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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조조

2020. 12. 3.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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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조조 차례다. 다들 알겠지만 맹덕이라는 자를 가져서 <맹덕신서>라는 책도 지었다. (이 책은 나중에 장송에게 개망신 당한다.) 어릴 적에는 아만이라고도 불렸다.

 

역사적 위인에게는 장점이 많다. 2,000년 가까운 옛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제일 기본인 총명함에다 결단력까지 갖췄으며 거기에다가 과감하기까지 하다.

 

조조는 어릴적 허자장이라는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로부터 치세에는 능신, 난세는 간웅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무척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총명함을 보여 준다.

 

또한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여백사네 집에 들렸다가 오해로 그 가족을 다 죽인 후에 진궁에게 내가 세상을 버릴 수는 있어도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결단성 과감성을 보여 준다. 거기다가 인간 조조의 잔인함까지 보여 준 것은 당연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자기 부하로 데려오려는 인재 욕심만큼은 오늘날의 기업 CEO나 정치 지도자들이 본 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조조에게 문무(文武) 양쪽의 인재들이 몰렸음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곧 3국의 국력 차이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조하면 임기응변의 달인임을 빼 먹어서는 안 된다. 군대 행군 도중 갈증으로 지친 군사들을 달래기 위해 산 고개 너머에 신맛 나는 매실 이야기로 입에 침이 고이게 하여 무사히 행운을 마친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가 망매해갈(望梅解渴).

 

또한 화용도에서는 관우에게 무릎 꿇고 눈물로 목숨을 구걸 하는것까지 거침없는 행보는 그의 변화무쌍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강을 만나면 원칙을 고수하며 멀리 돌아가는 유비의 따분함을 느끼는 독자라면, 다리를 만들어 빠르게 직진하는 조조에게서 통쾌함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거침없는 조조가 딱 한 가지 망설인 것이 있으니 바로 황제가 되는 것 이었다. 허수아비 황제를 겁박하고 황후는 죽이기까지 했지만, 조조 본인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로 가기는 거부했다.

 

황위를 찬탈한 역적이라는 운명을 자신이 뒤집어쓰기는 싫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조조가 죽은 후 그의 큰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나 그것은 조조가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생 인재를 구하기 힘썼고, 또한 그 만큼 사람에 대한 의심도 많았던 조조는 사마의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다른이 즉 유비나 손권의 부하가 되지 못하게 반강제로 자신의 부하로 불러들였지만 실질적으로 중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가 되면 봉황이 날아오르고, 바지속의 송곳도 날카로움을 드러내듯이 조조 사후 사마의가 결국 조씨 가문을 상대로 이겨 사마의는 손자 사마염 황제로 앉히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천하제일 기재였던 양수를 계륵이란 말 한마디로 그 싹을 잘랐는데 왜 조조가 사마의는 그대로 살려두고 중용하지 말라고만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여백사 가족을 몰살할 때나 양수를 죽일 때보다 더 나이 들면서 인간적으로 더 너그러워진 까닭이리라.

 

실력 위주의 인재 기용과 안정적인 내치와 실속있는 임기응변 전략구사 등은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조조를 보고 배우도록 만드는 점이다.

 

현대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성공했을 스타일이다. 조조를 향해 엄지척 한 방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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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술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식사이며, 음료수이자, 기쁨이요 슬픔 그 자체다. 삼국지연의에도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유난히 많은 장수가 한 명 있다. 바로 익덕 장비다.

 

의형인 미렴공 관우와는 달리 무척 까칠한 수염을 길렀던 모양이다. 여타 작가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삼국지에서 장비의 수염을 따끔따끔한 밤송이 껍질에 비유 했으니 말이다.

 

뚠자가 기억하는 장비의 첫 음주 장면은 도원결의다. 역시 첫 만남이라 장비도 무척 조심스러 웠나보다. 큰 문제는 없이 훈훈한 형제의 출발이 묘사되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황건적을 토벌하고 논공행상에서 정규군이 아니었던 유비는 공적에 비해 다소 초라하게 조그마한 고을 현령이 된다.

 

매관매직등의 부패가 만연하던 시기였던지라 황제의 칙사 독우라는 자가 감찰을 하러와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뇌물을 요구했다. 이런 모양을 며칠을 참다가 드디어 장비가 폭발한다.

 

음주 후 나무에 칙사를 묶어놓고 죽일 듯이 채찍질한 것이다. 그 일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는 조용히 잠수타기 신공에 들어갔다.

 

두 번째 음주 사건은 장비에게 본진을 맡기고 유비가 관우와 전투를 벌이러 나간 사이에 벌어졌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장비는 음주를 하게 되었고 주사를 부리다 부하를 구타하게 된다.

 

억울하게 맞은 부하는 여포에게 본진을 급습하도록 성문을 열어주었다. 장비는 유비 관우의 가족도 내버려둔 채 혼자 도망쳐야 했다.

 

세 번째 음주 사건은 장비 본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관우가 죽은 이후 유비가 이릉대전을 선언하자 장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으리라 다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출전하는 모든 병사에게 흰색 갑옷을 입으라고 지시한다. 기한을 지키지 못하자 장비는 음주후에 책임자들을 구타했다. 결국 구타당한 부하들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장비를 죽인다.

 

이처럼 술과 관련해서 장비의 인생은 한마디로 주생주사(酒生酒死)라 하겠다. 도원결의 음주를 통해 형제로 태어났고, 한잔 술로 부정부패 항거하고, 다른 한잔 술로 쪽팔린 도주를 하고, 마지막 한잔 술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것이다.

 

물론 술버릇으로 크게 덕을 본 경우가 있으니 유비가 촉으로 진군할 때 장비도 한 몫 하는데 엄안이라는 장수를 술자리로 유인하여 사로잡은 것 이었다.

 

이처럼 유독 장비에게만 술 관련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장비는 당시에도 알아주는 빨간코 주당이었던 모양이다.

 

장비는 워낙 다혈질에 성질 급한 싸움꾼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싸움만큼은 맞수였던 여포에게는 없는 의리가 있었으며 여포에게는 더더욱 없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별 볼일 없는 돗자리 장수 유비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은 물론이려니와 황제에 까지 올리는데 1등 공신이며, 제갈량의 신묘함을 확인한 후에는 업수히 여기지 않았으며, 군사 방통의 능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뿐인가? 촉의 장수 엄안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회유하여 귀순 시킨 것 또한 기본적인 장비의 스펙을 150% 상회하는 결과였다. 또한 장판교에서는 비록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꾀를 내어 조조의 백만대군도 진격을 멈추고 장비에 눈치를 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비는 처음엔 무력 위주의 테크트리 완성도만 보여주다가 점차소프트파워 부분의 성장마저도 보여주는 돋보이는 캐릭터가 된 것이다.

 

비록 주사가 심해서 문제가 끊이지 않았지만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의리의 장비였다.

 

세상 살다보면 이런 술버릇 가진 사람 한두명 알게 된다. 술 먹기 전에는 정말 말 잘 통하고 좋은 사람인데 술만 마시면 주사가 심한 사람들 말이다.

 

역시 교육의 문제라 본다. 술을 엉터리로 배워서 그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께서는 자녀가 음주를 하게 될 나이가 되면 먼저 선수를 치시라. 술을 권하고 좋은 주도(酒道)를 익히도록 힘써 주시기를 당부 드린다. 뚠자도 뚠뚠이를 그리 해보려고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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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

오늘은 삼국지의 많은 인물 중에 비주류 인물 한 명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바로 문제아 여포다.

 

삼국지에서 유래된 말 중에 마중적토 인중여포라는 말이 있다. ()들 중에서는 적토마가 가장 뛰어나며 사람들 중에서는 여포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말이다. 무엇이 뛰어나다는 말인가 하니, 장수로서 말 타고 무기 들고 일대일 대전을 벌이는 능력이 뛰어남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싸움 기술에 최고 수준이라는 여포가 힘과 속도에서 당대 최고라는 말인 적토마의 조합이니 으뜸 아니겠는가? 적토마를 탄 여포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 했겠는가?

 

사실 삼국지 연의를 보면 일대일 대전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여포라는 명성에 비해 실제로 승리를 거둔 유명한 장수는 의외로 드물다. 여포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주로 장비와의 대결이었던듯 싶다.

 

여포는 장비와 두 번이나 맞짱을 떴다. 처음 대결에서는 시종일관 팽팽했으나 다소 여포가 우세한 듯 나온다. 결국 관우와 유비가 가세하면서 3:1 싸움이되자 여포가 피하면서 승부를 보지 못했다.

 

두번째는 싸움에서도 다시 1:1로 싸우는데 이때는 '쪼다' 형님 유비가 장비를 불러들여 승부를 보지 못했다. 불꽃튀는 승부였으나 장비가 실수할까봐 불러들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두번 모두 여포는 좋은 말을 타고 싸웠으니 뚠자가 보기에는 장비의 판정승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할리데이비스와 스쿠터를 탄 사람들의 대결을 상상해 보면 될까 싶다. 마상에서의 칼싸움 시절 말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몇 번만 치고 빠져도 일반 말들은 지칠 텐데 적토마가 요리조리 달려 주며 상대를 압박 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이점이겠는가?

 

두 번이나 붙었던 장비에 입에서 삼성가노(三姓家奴)라는 욕이 튀어 나왔단다. 성씨를 세 개나 갖게 된 종놈 이라는 욕이다. 오로지 직진만하는 장비의 성격상 여포같은 인격을 보면 당연히 쌍욕이 나올법하다. 여포가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주류가 된 이유는 그를 거두어준 사람을 배신하고 죽이기를 두 번이나 했기 때문이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배신을 일삼는 자를 누군들 믿고 파트너로 삼으려 하겠는가?

 

의외로 진궁이 여포를 도와보려 했으나 여포는 항우급 인물이 아니었고 진궁은 범증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아니었다. 여포는 작은 이익 추구에 급급한 나머지 본인의 명성이나 상호 신뢰에 금이 가는 것은 신경 안 쓴 인물인 셈이다. 거시적 안목으로 현재 사안을 판단하고 명분을 지키고 큰 일을 도모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여포가 만약 명예를 존중하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다면 관우나 조자룡 같은 명성을 후대에 남기는 것은 물론 삼국지 연의의 내용 자체도 수정을 해야 할 만큼, 실제 역사도 크게 판도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여포가 첫 번째 양부 정원을 배신한 이유는 명마를 탐해서였다. 말을 탐내 양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똑같은 적토마였음에도 미렴공 관우는 말 선물을 받기는 하되 주군인 유비를 향한 충심을 버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비교된다.

 

여포가 두 번째 양부인 동탁을 배신한 이유는 초선이라는 미녀 때문이다. 연의에 나오는 이 초선이라는 미녀는 실존 인물은 아니라고들 한다. 아무튼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이유로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동탁은 여포에게 죽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꾼 나관중은 여포를 기막힌 로맨티스트로 만들어 주었다. 사랑을 위해 배신을 선택했다며 말이다. 좋게 포장해서 로맨티스트이지만 한낱 싸움꾼이고 호색한이며 배신자일 뿐이다.

 

마지막엔 기개마저도 버린다. 결국 조조와의 싸움에 여포군이 패하자 여포의 부하였던 진궁은 당당히 죽음을 요구한다. 하지만 여포는 여기서도 살아 보겠다고 조조에게 부하로 삼아 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여포의 무장으로서의 가치에 미련이 있던 조조가 주저 할 때 의외로 인간성 좋다는 유비가 단호하게 말한다. “정원이나 동탁의 전철을 보지 않았소?” 너무나 이성적이라는 조조의 주저함과 온화하다는 유비의 냉정한 결론이 대비되는 대목이었다.

 

삼국지 연의의 일진 중에서도 원탑이었던 여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경박하여 비주류로 전락하더니 끝내 비참한 최후로 일생을 마감한 여포를 보며 많은 어린 독자들이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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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장(雲長) 미렴공(美鬑公) 관우. 얼굴은 대추처럼 붉은색을 띠며 키는 8척이나 되고 적토마에 올라타서 무게가 80근이나 나가는 청룡언월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른다. 그의 애마이자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마라 불리는 적토마를 타고 바람처럼 달려서 적장과 생사를 건 한판 승부를 위해 달려가는 모습은 관우의 아랫배에 이를 정도로 길었다는 수염만큼이나 보는 이들의 긴 감탄을 자아내지 않았을까 한다.

 

유비를 처음 만날 때 관우는 때를 기다리며 마을에서 흔장을 하며 지냈다고 소설에 나온다. 문무를 겸비한 장수가 아니었을까? 물론 동탁의 화웅을 베고 원소의 안량과 문추를 손쉽게 제압해 버린 관우의 무용은 조조가 영원히 짝사랑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본인 입으로 말했듯이 타고 다니는 말이 무게를 버티지 못할 만큼이었다는 거구인데다가 붉은 얼굴색에 긴 수염으로 대표되는 특이한 모습에 청룡언월도를 장작 휘두르듯 하는 압도적인 무력을 갖췄으니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멋쟁이 임에도 내실을 갖추었던 인물임에 분명하다. 어디 그가 무장으로서 단순히 싸움만 잘했었던가? 군주를 향한 충성심이야말로 여포 못지않은 그의 무력이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유비가 제대로 전력을 다 갖추기 전, 조조와 맞짱뜨다가 개박살나고 도망가자 관우는 유비의 2명의 부인을 살리기 위해 조조에게 조건부 항복을 했다. 조건을 걸고서 항복하는 자나 그 조건 내용이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서라도 부하로 삼고 싶어하는 자.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아마 조조의 관우를 향한 사랑은 연합군이 동탁을 치러 모였으나, 여포의 부장 화웅에게 막혀 도무지 진격을 하지 못할 때부터 였을 것이다. 내보내는 장수들이 모조리 화웅에게 죽음을 당하자 두려움에 아무도 나서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관우가 일어섰고, 그 용기에 감탄하며 조조가 따뜻한 술 한잔을 준다. 그때 관우가 하는 말 한마디. “식기전에 베고 와서 마시겠소.” 관우는 약속을 지킨다. ~ (이런 멋진 사내들간의 대화와 행동에 뚠자는 뻑 간다.)

 

영원히 부하로 거두려는 조조는 넓은 집과 좋은 음식, 희귀한 보석 그리고 어마무시한 미녀들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했지만 관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딱 한 가지 적토마 만큼은 진심으로 기쁘게 받았을 뿐이다. 바로 주인 유비에게 바람처럼 달려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는 내심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말이다.

 

조조는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있고 인재에 대한 욕심도 대단했던 사람이다. 쓰던 안쓰던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기를 희망했다 아니 강요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서와 사마의였다. 그런 조조가 마음먹고 찍어본 장수가 관우였는데 웬걸 이빨도 먹히지 않았다.

 

유비의 행방을 확인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5개의 관문을 돌파하면서 막아서는 6명의 장수를 죽이면서까지 말이다. 그 유명한 관우의 ‘56장참대목이다. 지금 이야기한 이 대목은 영화 삼국지-명장 관우로도 나와 있다. 어찌나 재미있게 보았던지...

 

유비측에서는 언제나 확고한 2인자였으나 제갈공명의 등장 이후 존재감이 조금 떨어지긴 했다. 특히 적벽대전 말미의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주며 제갈량과의 목숨건 군령장 집행 대목에서는 관우의 체면이 많이 망가지기도 했다.

 

여기서 보여주는 조조와 관우의 인간적인 모습은 참으로 대단하다. 울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천하제일 권력자 조조와 다음 생에서나 친하게 지내보자는 관우의 마지막 보은말이다. 뚠자가 보는 남자들 세계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삼국지버전' 이다.

 

이후 유비가 기틀을 마련하며 서촉에서 황제에 오르며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다. 유비와 제갈량이 서촉으로 이동한 후, 관우는 형주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힘을 쏟는데 후반부에 들어서 약간의 판단력 저하가 있었던 것 같다.

 

오나라와는 평화를 유지하라는 제갈량의 신신당부 조차도 저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오나라 여몽의 기습 공격 한방으로 형주를 잃고 나자 너무 자포자기가 빨랐다. 독화살에 맞아 화타가 살을 찟고 뼈를 갈아내며 치료를 할 때에도 그 극심한 통증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 아니었던가? 참을성으로 권토중래를 기약하고 유비가 있는 본진으로 귀환 했었다면 어땠을까?

 

이릉대전의 시기와 장소, 장수가 달랐을 것이고 결과도 다르지 않았을까? 촉나라가 좀 더 에너지를 모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모은 에너지로 삼국통일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뚠자적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해 생각해 본 이야기다.

 

한편 관우의 죽음 이후 천년도 훨씬 넘은 뒤에 난데없이 동방예의지국 조선에 관우가 소환되었다. 공자가 아닌 관우가 말이다. 임진왜란을 끝낸 결정적 문제적 장수 이순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군주 선조는 삼국지의 관우를 끌어들인다.

 

그래서 동대문 근처에 '동묘'라는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만들어졌다. 관우가 우리나라에서도 신격화된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관우신은 토착 무속과 다시 한 번 더 결합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중국 본토 대만에서도 관우는 제갈량 못지않은 핵인싸. 유명 위인의 사후 무덤으로 보자면 문묘는 공자가 모셔져 있고, 무묘로는 관우묘가 있어 해마다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낸다.

 

특히 대문이나 금고에 관우의 형상이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관우가 지키고 있으면 복과 제물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기한 책략과 다양한 전술로 제갈량이 사랑 받았다면, 멋쟁이이면서 우직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이고 한없는 의리를 가진 '진짜 사나이'로서의 관우도 오늘날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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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삼국지를 읽은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내 마음속 영원한 1등 주인공은 언제나 공명 제갈량이었다. 이에 대한 변화는 앞으로도 없을듯하다. 그러나 오늘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았던 중달 사마의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정확한 자료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두 살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숙명의 라이벌이였던 셈이다. 사실 제갈량은 소설의 간판급 주요인물이라 유비의 삼고초려 이후부터 등장하여 소설의 후반부를 거의 장식하는데 반해 사마의는 제갈량의 위나라를 향한 북벌을 막아내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사마의 역시 제갈량 만큼의 명성을 젊은 시절부터 얻었던 모양이다. 조조는 그에게 자신을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였고 그것이 싫었던 사마의는 고의로 자신의 다리까지 부러뜨려 가며 벼슬길을 사양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계속되는 조조의 협박과 회유에 할 수 없이 세상에 나서게 된다.

 

비록 사마의를 세상에 끌어내기는 했지만, 조조는 사마의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중용하지는 않는다. 사마의도 가문의 유지만 목적일 뿐 크게 개의치 않는데 세상은 사마의를 조용하게 두지 않을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오래전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명성이 자자한 양씨 가문의 양수와 가문의 명운이 걸린 싸움을 하게 된다. 양수는 조조의 3남인 조식을 조조의 후계자로 밀고 있었고, 사마의 가문은 조조의 장남 조비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조조 사후 권력을 가져 가느냐에 따라 둘 중 한 쪽 가문은 무척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허나 우리는 소설의 내용을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장남인 조비가 조조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울러 라이벌 관계였던 양수는 조조 생전에 참형을 당했다. 너무 똑똑한 것을 티내다가 조조의 심기를 거슬린 것이다. ‘계륵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하니 그 똑똑한 머리로 왜 조조의 성격은 계산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사마의는 조조의 심리상태 마저도 잘 이해하고 있어서 가문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가문이 멸문의 위험에 빠진 것은 조조의 죽음 이후였다.

 

카리스마 넘쳤던 조조인지라 그의 생전에는 모든 권력이 조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조가 죽자마자 차남인 조창이 잠시 권력에 마음을 가져도 보았고, 다른 조씨 친척도 병권을 유지하며 사마의 가문 전체와 권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수차례 막아내며 병권을 틀어 쥐게 되었고 매번 중앙 권력자의 의심의 눈초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가문 전체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조조의 죽음 이후 매번 들어선 조씨 가문의 후계자들이 단명을 하게 되니 모든 국가 권력은 자꾸만 사마의에게 집중되었다. 이처럼 신하인 사마의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결국은 그 권력의 힘을 이용하기로 사마의도 결심했다. 결국 그가 주인으로 모셨던 조조가 걸어갔던 길과 아주 흡사한 길을 걷게 된다. 제갈량을 상대로 동수는 유지했으며, 당대 천재였던 양수마저도 이겼던 지라 조씨 집안의 인물들은 사마의에게 상대도 안되었던 것이다.

 

정권을 휘어잡기는 했지만 사마의도 끝까지 조조처럼 직접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일은 조조를 보고 배운 듯한데 황제 자리를 강탈했다는 이름을 역사에 남기지 않으려 한듯하다. 하지만 후대의 유명한 역사가 중 한 명은 조조와 사마의를 뭉뚱그려 직접 찬탈을 하진 않았으나 회유와 협박으로 미망인과 어린아이를 궁지에 몰았다는 비난을 하였다.

 

후대에 조조가 먹은 욕 만큼은 아니지만 사마의도 매서운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하겠다. 한편 평소에 궁금했던 점은 왜 진나라는 사마의의 장자가 아닌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이 세운 것이었을까 이다.

 

의외로 사마의의 장남은 결혼 후 처가 죽은 후 더 이상의 자녀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차남의 자손인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를 가져갔던 모양이다.

 

아무튼 사마의로 대표되는 사마 가문도 멸문의 위기를 사마의의 지략으로 넘기며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자긍심만 있고 후회는 없을 것이다.

 

*중국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꼭 한번씩들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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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vs 충무공

2020. 9. 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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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vs 충무공

삼국지는 명나라 초기에 정리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나관중이다. 소설 삼국지연희는 조선시대 중반 선조 2년때 기록에 나타난다. 기대승이라는 성리학자가 선주에게 상소를 올렸다.

 

"명나라의 소설 삼국지가 요즘 세상에 너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으니 풍속을 해칠까 염려가 된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선조 2년에 열풍이 불었다고 하니 혹시나 우리 이순신 장군께서도 읽으셨을까? 뚠자는 그 점이 너무 너무 궁금하다.

 

아무튼 그 당시의 광풍에 힘입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시호인 충무. 그런데 이 충무라는 시호를 1천년도 더 이전에 앞서 받은이가 중국에 있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이다.

 

우리 충무공 생전에 그리도 못마땅해 하며 목숨마저도 거두려했던 선조가 공께서 전사하신 이후 정신을 차렸는지 그래도 시호 하나는 제대로 붙여 주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충성스럽고 전무후무한 군사전략가로 칭송받는 제갈량과 같은 시호를 내렸으니 말이다.

 

공신의 품계에도 낮은 등급을 내린 선조가 마음도 삐딱하게 먹고 소설에나 나오는 인물의 시호나 가져라하는 마음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하자. 양심상 찔려서 시호만이라도 극진히 대접해 준것이라고 선조를 믿어보자.

 

아무튼 똑같은 시호를 받게된 중국의 5천년 역사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충무공 제갈량과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위대한 해군 제독 충무공 이순신. 이 두명의 충무공에 대해 간단한 비교를 해 보겠다.

 

먼저 우연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두분의 충무공은 모두 사망할 당시 향년 54세였다. 과업을 완수하지 못해 수명을 더 늘려보려 했으나 장수 위연이 망쳐 한을 품고 죽은 제갈량. 반대로 우리의 공께서는 마침내 왜적을 물리치고 본국으로 도망가는 적들을 쫒으며 여한 없는 해전을 마무리 지으며 장렬히 전사하셨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두 충무공은 육전과 수전을 가리지 않는 명장이었다. 대부분이 육지에서의 싸움인 중국은 제갈량을 통해 적벽이라는 바다급의 거대한 강을 통해 물을 기반으로 하는 전투 장면을 역대급으로 다루었다. 물안개와 10만개 화살. 물 멀미와 배를 연결하는 연환계. 그리고 화공.

 

우리의 충무공께서는 원래 육지에서 근무하셨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아마도 선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 사건이 녹둔도 사건일 것이다. 공께서는 무명시절에 두만강 인근의 녹둔도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대항하여 열심히 분전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숫적으로나 애초에 불리했기에  패해 후퇴하게 된다. 이에 그 지역을 총괄하던 상관은 충무공을 잡아 본인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했으나, 녹둔도의 군사적 상황을 아는 조정에서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을 하라 명한다. 얼마후 서애 선생의 도움을 받아 충무공께서는 수군에서 중책을 맡게되셨다. 그리고 그 공적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운 정도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두 충무공 모두 신기술을 전투에 적용하는 실험정신이 뛰어난 분들이었다. 중국 충무공은 목우와 유마, 연(kite) 등 중국의 모든 것은 제갈량에서 시작됐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기술과 아이디어 등을 선보였고, 우리의 총무공께서도 세계 최초의 철갑 전투선을 전투에 투입하셨다. 거북선은 임란이 터지기 직전에 건조가 되었으니, 그에 대한 훈련과 운용 그리고 실전에 투입하는 것등 모두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는 것이라 안전한 판옥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과감한 실험정신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두 충무공은 평소 부하 군사들을 훈련 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게 진법이란 전쟁에서 바로 써먹기 위해 군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전개되야 하는데, 두명의 충무공의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 진법을 주로 운용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제갈량의 팔진도, 우리나라에서는 충무공의 학익진이 대표적이다.

 

두 분 모두 불멸의 문장 가셨다. 중국 충무공은 군주인 유비가 죽은 후 위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며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그 유명한 '출사표'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의 충무공은 다양함에서 더욱 빛을 발하셨다. 그 전쟁 기간 동안 내내 하루하루 일기를 기록하시며 난중일기를 지으셨고, 그 와중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영웅적 시조까지 지으신다. 그리고 마지막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울컥하는 상소문마저 남기셨다. 아~ 정말 공께서는 뚠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십니다.

 

두 충무공은 멸사봉공의 자세로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며 결코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중국의 충무공의 황제의 자리를 취하라는 군주의 말을 물리쳤고, 우리 공께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업을 도모하자는 명나라 진린의 말을 거절했다.

또한 장수로서 최고의 명예라는 전장에서의 죽음을 두 분 다 몸소 실천하였다.

 

물론 두 분 다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셨다. 중국의 충무공은 천시와 지리를 넣어 전쟁에 응용한다라고 하는 전쟁의 기본적 부분을 잘 보이시며, 죽어서도 사마중달이 도망가게 할 정도이니 그 지략의 무궁함이 당대 최고이셨다. 하지만 우리 총무님께서는 어떠신가? 23전 23승. 무패로다. 전투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신다. 한산도에서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보여주시고, 명량에서는 죽음을 능가하는 지략과 기개로 그 불리한 싸움마자도 기적의 승리를 일궈놓으시니 진짜 말이 필요없는 경지인 것이다.

 

다른점을 하나 꼽으라면 중국의 충무공은 군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다시피 하였으나, 우리의 충무공은 군주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기와 질투를 받고 그 선물로 고문이라는 아주 지독한 선물까지도 받았다.

 

아무튼 두 충무공은 당대를 살았던 그 어떤 장수 장군들 보다도 레벨이 다른, 클래스가 다른 인물들이었던 것은 사실인것 같다. 감히 뚠자가 두분의 충무공을 존경하며 이렇게 비교 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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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삼국지가 황건적의 난을 기술하며 시작한다. 아울러 유비가 등장하고 이어 그 유명한 도원결의가 이뤄진다. 따라서 삼국지의 주인공 중에서 단연 유비에 대한 언급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대부분 나관중 삼국지의 시각과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들 하지만 작가의 시각에 따라 상당한 주관적 평가도 따르게 마련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설민석의 삼국지'는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에 대해 상당히 후한 평가를 해 주었다. 20여년전에 읽은 '이문열의 삼국지'를 보면 굉장히 실용성을 중시하며 조조는 치켜 올리고 유비는 한없이 까 내린다. 이런 경향은 30여년 전에 읽은 '고우영의 삼국지'에서는 더욱 잘 나타나는데, 유비를 아예 '쪼다'로 부르기까지 한다.

 

작가의 원전 재해석은 나름의 시각이 반영되는 것이므로 읽는 재미가 있다 하겠다. 뚠자도 뚠자의 시각으로 유비를 표현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유비는 그저 시골의 돗자리 장수였다. 비록 황제의 먼 친척이라고 하지만 '중산정왕의 후예'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중산정왕의 아들만 120여명이라니 그 후예라고 해서 특별한 신분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니 집안 사정이야 뻔할 것이고 그래서 돗자리짜며 연명했을 것이다.

 

그런 유비가 후에 3분의 1만큼이긴 하지만,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자수성가한 입신 양명은 인정해 주어야 마땅하다. 동네 이장쯤에서 중국 전체를 거머쥔 한고조 유방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공적이라 뚠자는 생각한다.

 

흔히 유비는 민중의 아픔을 생각하며, 민중과 함께한 군주로 여겨진다. 제일 극명하게 표현된 곳이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유비 일행이 신야성을 나와 도망칠때 백성을 버리고 먼저 빨리 도망가자고 하는 말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백성과 함께 도망친 부분이다.

 

이 부분이 진심이었던 의도적이었던 유비는 민심과 함께 한다는 결정적 대중 지지도를 갖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부인 하나가 죽고, 갖 나은 아들마저도 별거 아니라는 듯 내동댕이 치며 조자룡의 안위를 걱정함에 대중의 지지도 상승도 상승이지만, 적극적 지지자인 부하들의 충성심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게 된다.

 

'아! 저런 사람의 부하구나 우리는...' 하는 생각을 갖는 부하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다.

 

따라서 뚠자의 입장에서는 조조만큼의 업적은 안되니 별 볼일 없다거나 심하게 '쪼다'로 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유비는 유비만이 가진 캐릭터적 매력으로 대중의 지지도와 열성 부하들의 자발적 충성 지원덕에 무명의 돗자리 장수에서 황제의 반열로 간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로 이름을 남겼으니 말이다.

 

뚠자는 유비의 덕망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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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대전, 삼국지에 등장하는 최대규모의 전쟁중 관도대전, 적벽대전에 이은 3번째 전쟁이다.

관우의 죽음이후,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긁어모아 손권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손권측에서는 여몽의 급사(갑작스런 죽음)로 인해, 젊은 육손이 대장에 임명되어 싸움에 임하게 되니 촉에서는 유비가 오에서는 육손이 전쟁을 진두 지휘하는 형국이다.

 

초반의 기세는 복수심에 불타는 촉군에 유리하였으나, 지루할 정도로 침착한 육손의 대응에 차츰 예리함이 무뎌진 촉군은 한여름 더운날씨에 시원한 숲속으로 군영을 옮기며 더위를 피하려 한다.

 

그러자 지금까지 일부러 후퇴를 거듭하며 기회를 노리고있던 육손은 화공으로 숲에 불을 질러 100만 대군 유비군을 거의다 불에 태워 죽인다.

 

유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울화병에 걸렸고, 만류하던 제갈량을 만나볼 염치가 없어 상당기간을 접경지대인 백제성에서 머물다가 죽고만다.

 

이 싸움이 갖는 의미는 적벽대전 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한다. 적벽대전이 잘나가던 조조의 위세가 꺾이며 유비의 상승세를 이끌어냈다면, 이 이릉대전은 잘나가던 유비군이 대규모 병력 손실과 함께 확장의 기세가 꺾였다는 점이다.

 

조금 더 참고 그 병력을 더욱 조련하여 먼저 동오와 연합하여 다시 한번 위와 결전을 벌였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울러 이 전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 초반의 주인공인 유관장 의형제들이 모두 죽으면서 1세대들의 퇴진이 가속화되고, 제갈량, 사마의 등 2세대들의 전면적 등장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삼국지 3대 전쟁을 모두 살펴보았다. 공교롭게도 모두 불에 의해 결정적 전투에서 승부가 갈렸으며, 모두 수비하는 입장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역시 공격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NCO1tHW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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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읽다보면 무척 많은 전쟁들이 나온다. 황건적과의 전쟁, 동탁 vs 연합군의 전쟁, 원소 vs 조조의 전쟁등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흥이나며 제갈량의 가세로 각국의 참모가 초절정 상태의 지략 대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적벽대전은 가히 원탑으로 불릴만한 전쟁일 것이다.

 

특히 특히 형주를 거점으로 하며 조조군과 맞써 싸울 상황도 될법했던 유비가 군자의 길을 걷는 바람에 조조는 너무나 손쉽게 형주를 차지한다. 여기서 다들 유비를 쪼다라고 한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안전을 확보하고 민심을 수습하며 자신에게 충성할 군대를 만들기에는시간이 너무 부복한 것이었다. 조조가 기다려 준다던가? 유비도 나름 멀리 한수 내다 본 결정이었으리라. 거기다 명분도 있지 않은가? 형제의 땅을 취할 순 없노라....ㅋ

 

그러니, 조조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싸움없이 형주까지 차지하고 보니 내친김에 천하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장강이 최대 장벽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내버려 둘수만도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진행 국면을 들여다보면, 조조 vs 유,손 연합 대결보다는 오히려 제갈량과 주유의 대결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천하를 노리는 유, 손 두 진영의 최고 수뇌부의 지략 대결은 적벽대전 서막부터, 전쟁 후 주유가 죽을때까지 이어진다.

 

초반에 제갈량의 동오를 방문하면서 주유는 제갈량을 떠보려하지만, 오히려 주유 부인을 들먹이는 제갈량의 심리전에 말려들어 흥분하며 선수를 빼앗긴다. 이후, 화살 10만개, 동남풍 사건, 형주 장악, 유비와 손상향의 결혼 등 모든 부분에서 주유는 제갈량에게 매번 당하고 만다. (제갈량은 이와중에 또 다른 라이벌 관우를 완전히 제압한다.)

 

허풍과 과장이 있겠지만, 소설로만 대한다면 제갈량은 거의 신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므흣)

 

적벽대전에는 복룡봉추 중의 한명인 봉추 방통도 등장해 한몫하고 대기 모드로 들어간다. 장강은 중국에서 항하와 더불어 어마어마하게 큰 강이다. 이곳에 육지에서만 싸움하던 병사들이 물결의 흔들림에 중심을 못잡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조조군을 아무 의심없이 배를 서로 묶어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고 설득한 이가 바로 방통이었다. 이후 방통은 의외로 동오에서 크게 대접을 못받게되자 유비를 찾게 된다.

 

아무튼 전쟁은 벌어졌고, 적벽에서 조조는 대패하고 그 기세가 꺽인다. 조조의 생애에서 천하통일은 물 건너 갔음을 조조도 느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전쟁으로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며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특히 내실있는 행정을 바탕으로 인물을 정비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추가로 서촉까지도 얻게된다. 유비 세력이 국가급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 배경은 적벽대전이었다.

 

한편 전쟁을 압도적 대승으로 마무리지었으나 결과적으로 얻은게 없는 손권측은 상대적 박탈을 느끼며 형주를 차지한 유비가 배아픈 상대가 된다. 틈만 나면 유비가 차지한 형주를 노리게 되며, 둘 사이에는 협력하기 어려운 보이지않는 틈이 생기게 된다. 이는 삼국지 3대전쟁의 마지막인 이릉대전의 불씨가 된다.

 

다음 동영상은 뚠자가 아들 뚠뚠이와 적벽대전에 대해 나눈 이야기입니다.

PPT로 자료를 보면서 이야기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6DYakURf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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