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벽이 없는 세계

이 책의 저자는 말레이시아의 외교관이다. 이 책은 2018년에 출간된 <벽이 없는 세계 2>를 번역한 책이다. 외교관의 시각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이해 충돌과 그 진행과정의 대략적인 설명, 그리고 저자의 해당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책을 시작하자마자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붕괴, 포퓰리즘의 부상, 강한 케릭터의 국가지도자 등장 및 미국과 중국간의 신냉전 등 범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한민국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항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분석하는 기준으로 국가간 힘의 세기와 그 이동, 지정학에 대한 고려,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을 파악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일 욕을 많이 먹지만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이제 점점 더 그 힘이 약해질 것 같다. 영국의 EU 탈퇴인 브렉시트만 봐도 그러하다. 또한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견제 등 세계적으로 강대국의 속해 있던 그룹들이 글로벌 혹은 로컬 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신흥세력들에 대한 견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뚠자는 생각한다.

 

포퓰리즘은 각 국가 내에서 주로 이슈되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권력을 잡기 위해 이제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대중을 통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단순한 언론만으로는 더 이상 전 국민을 조종하기 어려워졌으며, 지지층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방법으로 정치 전략이 바뀐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다.

 

좋은 정치적 목적이냐에 상관없이 전체 대중의 절반을 목표로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반대편은 포기하고 자신의 편을 모으겠다는 위험한 사고방식이 것이다.

 

이를 통해 센 캐릭터들이 국제적 리더로서 나타나고 있다. 푸틴을 비롯하여 시진핑 트럼프는 물론이고 필리핀의 두테르테까지...

 

순수한 정치적 시스템으로 출발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이미 자본주의에 너무 물들어 버렸다. 부의 지나친 분배 불균형으로 인해 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면서 민주주의 시스템의 순기능은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지 오래다. 따라서 간편하고 빠르게 정치적 해결력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지도자로 원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요즘 가장 지구촌의 큰 정치적 이슈인 미국과 중국의 이해 충돌을 이야기하는데, 2018년에 씌어졌지만 그 여파는 2020년이 후반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중이니 보통 이슈가 아님은 분명하고 이 한가운데에 대한민국이 끼어있으니 여차하면 1636년 병자호란 직전의 상황이 아닌가 뚠자는 무척 걱정된다.

 

책 내용에는 없지만 뚠자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둘러싼 공방과 미국의 중국에 대한 기술 및 반도체 부품의 봉쇄 등은 앞으로도 미중 냉전은 계속해서 대한민국의 외교력을 시험할 것이라고 본다.

 

지정학적인 고려와 관련해서는 러시아의 부동항 추구, 그리스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서방 세계의 그리스 구하기,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 절대 고수, 북극항로 개발에 관해 북극권 국가아닌 적도권 싱가포르 참여 등 많은 사례를 들며 알기 쉽게 이야기 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라는 나라의 지명을 둘러싼 신경전이다. 마케도니아의 공식 국가 명칭은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다. 그냥 마케도니아라고 못 한단다.

 

이유는 그리스가 반대하는 것인데 두 나라 모두 자국내 마케도니아라는 지역이 있는데 각자가 그 지역이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NATO(북대서양 방위조약 기구) 가입을 놓고 서로 국가명칭 문제를 양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안보보다도 나라의 상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례를 보여 준다 하겠다.

 

그 외에도 사우디왕자 빈 살만에게 살해 당한 자말 카슈끄지는 언론인으로서 정권을 비판하다 죽은 순수한 기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외부세력을 이용해 어느 정도 사우디 국내 정치에 관여하려고 일을 진행하던 중 들통이 나면서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왕세자가 일을 진행한 것이었다. 역시 뚠자는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대한민국 관련된 부분도 나온다. 3국의 외교관의 시선으로 바라본 대한민국 관련된 내용이라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역시 북한의 핵이 제일 이슈이며 주요 인물로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으로 나온다.

 

30대 초반에 권력을 물려 받았으나 고모부와 이복형의 존재는 항상 위험요소였단다. 또한 중국에서도 친중국 성향의 이 둘로 정권을 교체하려 하자 김정은도 살기 위해 먼저 이 두명을 각각 제거한다. 이어 독자생존 영역을 구축하고 한국, 미국과 연쇄적 정상회담을 하며 경제제재를 풀어보려 하는 것이란다. 하지만 결국 핵폭탄 포기는 없을 것이라 저자는 예측한다.

 

한편 햇볕 정책의 계승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위기 돌파구를 찾으러 여러 가지 노력을 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시스템상 임기는 너무 짧고, 미국 중국 일본 등 통일된 한국을 바라지 않는 강대국들로 인해 당분간의 긴장 상태는 더 계속될 것이다 내다보았다.

 

특히 일본은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한국을 대륙으로부터이 위협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위협을 상쇄시키는 완충지대가 필요하기에 더욱 남북한의 분열 혹은 대립을 지속하도록 요구 할 것이라는 점이다.

 

뚠자는 일본이 과거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후 6.25덕에 군수품 공급을 하며 급속으로 회복한 경험이 있기에 한반도의 분열 혹은 전쟁을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은 애초에 뼛속부터 한국을 위험에 대한 완전판으로 생각해온 것임을 외국 외교관으로부터 한수 배웠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인터뷰 끝 부분에 나와있는데 짚고 넘어가야 겠다.

 

질문 : 독자에게 하실 말씀은?

저자 : 지식을 겸허히 여기고 사실에 따라 이념과 입장을 바꿀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이다 국가가 이웃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국가간의 힘의 균형이나 국익을 앞세워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입장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개인이 저렇게 하면 어찌 될까?

 

국가를 팔아먹는 매국노에서부터 이웃을 속이는 사기꾼까지 모두 정당화 될 수 있는 말이므로 저자의 충분한 배경 설명이 있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나름 제3자의 눈으로 본 국제 정세이기에 국내는 물론 국제 정치에 관심있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728x9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밤의 공대생 만화  (0) 2020.10.09
진화의 배신  (0) 2020.10.04
삼국지 속 한 인물 - 사마의  (0) 2020.09.30
충무공 vs 충무공  (0) 2020.09.26
제갈량의 학문 - 기문둔갑  (0) 2020.09.20
Posted by ttoonza
,
728x90

사마의

삼국지를 읽은 이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내 마음속 영원한 1등 주인공은 언제나 공명 제갈량이었다. 이에 대한 변화는 앞으로도 없을듯하다. 그러나 오늘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았던 중달 사마의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정확한 자료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두 살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숙명의 라이벌이였던 셈이다. 사실 제갈량은 소설의 간판급 주요인물이라 유비의 삼고초려 이후부터 등장하여 소설의 후반부를 거의 장식하는데 반해 사마의는 제갈량의 위나라를 향한 북벌을 막아내는 부분에 집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사마의 역시 제갈량 만큼의 명성을 젊은 시절부터 얻었던 모양이다. 조조는 그에게 자신을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였고 그것이 싫었던 사마의는 고의로 자신의 다리까지 부러뜨려 가며 벼슬길을 사양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계속되는 조조의 협박과 회유에 할 수 없이 세상에 나서게 된다.

 

비록 사마의를 세상에 끌어내기는 했지만, 조조는 사마의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중용하지는 않는다. 사마의도 가문의 유지만 목적일 뿐 크게 개의치 않는데 세상은 사마의를 조용하게 두지 않을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오래전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명성이 자자한 양씨 가문의 양수와 가문의 명운이 걸린 싸움을 하게 된다. 양수는 조조의 3남인 조식을 조조의 후계자로 밀고 있었고, 사마의 가문은 조조의 장남 조비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조조 사후 권력을 가져 가느냐에 따라 둘 중 한 쪽 가문은 무척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허나 우리는 소설의 내용을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장남인 조비가 조조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울러 라이벌 관계였던 양수는 조조 생전에 참형을 당했다. 너무 똑똑한 것을 티내다가 조조의 심기를 거슬린 것이다. ‘계륵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하니 그 똑똑한 머리로 왜 조조의 성격은 계산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사마의는 조조의 심리상태 마저도 잘 이해하고 있어서 가문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가문이 멸문의 위험에 빠진 것은 조조의 죽음 이후였다.

 

카리스마 넘쳤던 조조인지라 그의 생전에는 모든 권력이 조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조가 죽자마자 차남인 조창이 잠시 권력에 마음을 가져도 보았고, 다른 조씨 친척도 병권을 유지하며 사마의 가문 전체와 권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수차례 막아내며 병권을 틀어 쥐게 되었고 매번 중앙 권력자의 의심의 눈초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가문 전체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조조의 죽음 이후 매번 들어선 조씨 가문의 후계자들이 단명을 하게 되니 모든 국가 권력은 자꾸만 사마의에게 집중되었다. 이처럼 신하인 사마의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결국은 그 권력의 힘을 이용하기로 사마의도 결심했다. 결국 그가 주인으로 모셨던 조조가 걸어갔던 길과 아주 흡사한 길을 걷게 된다. 제갈량을 상대로 동수는 유지했으며, 당대 천재였던 양수마저도 이겼던 지라 조씨 집안의 인물들은 사마의에게 상대도 안되었던 것이다.

 

정권을 휘어잡기는 했지만 사마의도 끝까지 조조처럼 직접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일은 조조를 보고 배운 듯한데 황제 자리를 강탈했다는 이름을 역사에 남기지 않으려 한듯하다. 하지만 후대의 유명한 역사가 중 한 명은 조조와 사마의를 뭉뚱그려 직접 찬탈을 하진 않았으나 회유와 협박으로 미망인과 어린아이를 궁지에 몰았다는 비난을 하였다.

 

후대에 조조가 먹은 욕 만큼은 아니지만 사마의도 매서운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하겠다. 한편 평소에 궁금했던 점은 왜 진나라는 사마의의 장자가 아닌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이 세운 것이었을까 이다.

 

의외로 사마의의 장남은 결혼 후 처가 죽은 후 더 이상의 자녀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차남의 자손인 사마염이 황제의 자리를 가져갔던 모양이다.

 

아무튼 사마의로 대표되는 사마 가문도 멸문의 위기를 사마의의 지략으로 넘기며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자긍심만 있고 후회는 없을 것이다.

 

*중국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꼭 한번씩들 보시기를...

728x9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화의 배신  (0) 2020.10.04
벽이 없는 세계 - 아이만 라시단 윙  (0) 2020.09.30
충무공 vs 충무공  (0) 2020.09.26
제갈량의 학문 - 기문둔갑  (0) 2020.09.20
삼국지 - 주관적으로 보는 유비  (0) 2020.09.19
Posted by ttoonza
,

충무공 vs 충무공

2020. 9. 26. 14:51
728x90

충무공 vs 충무공

삼국지는 명나라 초기에 정리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나관중이다. 소설 삼국지연희는 조선시대 중반 선조 2년때 기록에 나타난다. 기대승이라는 성리학자가 선주에게 상소를 올렸다.

 

"명나라의 소설 삼국지가 요즘 세상에 너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으니 풍속을 해칠까 염려가 된다"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선조 2년에 열풍이 불었다고 하니 혹시나 우리 이순신 장군께서도 읽으셨을까? 뚠자는 그 점이 너무 너무 궁금하다.

 

아무튼 그 당시의 광풍에 힘입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시호인 충무. 그런데 이 충무라는 시호를 1천년도 더 이전에 앞서 받은이가 중국에 있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이다.

 

우리 충무공 생전에 그리도 못마땅해 하며 목숨마저도 거두려했던 선조가 공께서 전사하신 이후 정신을 차렸는지 그래도 시호 하나는 제대로 붙여 주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충성스럽고 전무후무한 군사전략가로 칭송받는 제갈량과 같은 시호를 내렸으니 말이다.

 

공신의 품계에도 낮은 등급을 내린 선조가 마음도 삐딱하게 먹고 소설에나 나오는 인물의 시호나 가져라하는 마음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하자. 양심상 찔려서 시호만이라도 극진히 대접해 준것이라고 선조를 믿어보자.

 

아무튼 똑같은 시호를 받게된 중국의 5천년 역사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충무공 제갈량과 우리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위대한 해군 제독 충무공 이순신. 이 두명의 충무공에 대해 간단한 비교를 해 보겠다.

 

먼저 우연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두분의 충무공은 모두 사망할 당시 향년 54세였다. 과업을 완수하지 못해 수명을 더 늘려보려 했으나 장수 위연이 망쳐 한을 품고 죽은 제갈량. 반대로 우리의 공께서는 마침내 왜적을 물리치고 본국으로 도망가는 적들을 쫒으며 여한 없는 해전을 마무리 지으며 장렬히 전사하셨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두 충무공은 육전과 수전을 가리지 않는 명장이었다. 대부분이 육지에서의 싸움인 중국은 제갈량을 통해 적벽이라는 바다급의 거대한 강을 통해 물을 기반으로 하는 전투 장면을 역대급으로 다루었다. 물안개와 10만개 화살. 물 멀미와 배를 연결하는 연환계. 그리고 화공.

 

우리의 충무공께서는 원래 육지에서 근무하셨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아마도 선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 사건이 녹둔도 사건일 것이다. 공께서는 무명시절에 두만강 인근의 녹둔도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대항하여 열심히 분전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나 숫적으로나 애초에 불리했기에  패해 후퇴하게 된다. 이에 그 지역을 총괄하던 상관은 충무공을 잡아 본인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했으나, 녹둔도의 군사적 상황을 아는 조정에서 곤장을 치고 백의종군을 하라 명한다. 얼마후 서애 선생의 도움을 받아 충무공께서는 수군에서 중책을 맡게되셨다. 그리고 그 공적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운 정도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두 충무공 모두 신기술을 전투에 적용하는 실험정신이 뛰어난 분들이었다. 중국 충무공은 목우와 유마, 연(kite) 등 중국의 모든 것은 제갈량에서 시작됐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기술과 아이디어 등을 선보였고, 우리의 총무공께서도 세계 최초의 철갑 전투선을 전투에 투입하셨다. 거북선은 임란이 터지기 직전에 건조가 되었으니, 그에 대한 훈련과 운용 그리고 실전에 투입하는 것등 모두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는 것이라 안전한 판옥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과감한 실험정신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두 충무공은 평소 부하 군사들을 훈련 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게 진법이란 전쟁에서 바로 써먹기 위해 군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전개되야 하는데, 두명의 충무공의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인 진법을 주로 운용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제갈량의 팔진도, 우리나라에서는 충무공의 학익진이 대표적이다.

 

두 분 모두 불멸의 문장 가셨다. 중국 충무공은 군주인 유비가 죽은 후 위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며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그 유명한 '출사표'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의 충무공은 다양함에서 더욱 빛을 발하셨다. 그 전쟁 기간 동안 내내 하루하루 일기를 기록하시며 난중일기를 지으셨고, 그 와중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영웅적 시조까지 지으신다. 그리고 마지막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울컥하는 상소문마저 남기셨다. 아~ 정말 공께서는 뚠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십니다.

 

두 충무공은 멸사봉공의 자세로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며 결코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중국의 충무공의 황제의 자리를 취하라는 군주의 말을 물리쳤고, 우리 공께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업을 도모하자는 명나라 진린의 말을 거절했다.

또한 장수로서 최고의 명예라는 전장에서의 죽음을 두 분 다 몸소 실천하였다.

 

물론 두 분 다 화려한 전적을 보여주셨다. 중국의 충무공은 천시와 지리를 넣어 전쟁에 응용한다라고 하는 전쟁의 기본적 부분을 잘 보이시며, 죽어서도 사마중달이 도망가게 할 정도이니 그 지략의 무궁함이 당대 최고이셨다. 하지만 우리 총무님께서는 어떠신가? 23전 23승. 무패로다. 전투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신다. 한산도에서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보여주시고, 명량에서는 죽음을 능가하는 지략과 기개로 그 불리한 싸움마자도 기적의 승리를 일궈놓으시니 진짜 말이 필요없는 경지인 것이다.

 

다른점을 하나 꼽으라면 중국의 충무공은 군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다시피 하였으나, 우리의 충무공은 군주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시기와 질투를 받고 그 선물로 고문이라는 아주 지독한 선물까지도 받았다.

 

아무튼 두 충무공은 당대를 살았던 그 어떤 장수 장군들 보다도 레벨이 다른, 클래스가 다른 인물들이었던 것은 사실인것 같다. 감히 뚠자가 두분의 충무공을 존경하며 이렇게 비교 할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정도다.

728x90
Posted by ttoonza
,
728x90

기문둔갑 포국의 예

중국 역사상 최고의 두뇌와 높은 충절로 만인에게 추앙받고 있는 제갈량은 어떠한 학문을 갈고 닦았기에 그렇게 대단한 명성을 얻었던 것일까? 초등생이었던 뚠자가 처음 삼국지를 읽으면서 가졌던 의문점이다.

 

공자 사상이나 노자, 장자의 가르침으로는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에선 그리 실용성이 없어 보이며 손자병법 오자병법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미래 예측적인 부분이 있어 보인다. 즉, 단순한 병서의 기본만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무슨 학문을 별도로 배우거나 연구한거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이긴하지만, 공부하기 바쁘니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14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뚠자는 우연한 기회에 제갈량이 어떤 학문을 익혀서 미래를 예측하고 적벽에서 호풍환우(바람을 부르고 비를 맞이함)의 신선술을 부렸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제갈량의 기가 막힌 전략전술의 근거가 되는 학문은 바로 '기문둔갑'이었던 것이다.

 

흔히 요즘 말하는 기문둔갑은 개인의 운세를 보는 사주 명리학이나 자미두수와 비슷한 잡술로 여겨진다. 21세기인 2020년 지금 보기엔 허무맹랑하다 생각할 정도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정작 관련된 책을 1권 사서 들여다 보면 내부에 잘 짜여진 그 오묘한 숫자 놀음에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2000년 전에는 제왕학으로 불리울만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제갈량은 숫자의 조합을 해석함으로 세상 모든 관심사를 풀어낸다는 이 학문을 지극히 깊이 연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갈량이 조조군을 상대로 형주에서 싸움을 하게 되는데 조조군이 진법에 따라 군을 움직이자, 제갈량은 조자룡으로 하여금 진법을 파해하는 법을 알려준다. 휴문 생문 상문 두문 경문 사문 경문 계문의 8문의 위치와 간단한 방위를 설명해 주고 어디로 공격을 들어가 어느 곳으로 빠져나오면 조조군의 진법이 쉽게 무너지는지를 말해 주었다. 이때 처음 9궁팔괘진이 등장하면서 기문둔갑이 삼국지에서 소개된다.

 

이런 8문의 등장과 파해법에 이어 적벽대전에서는 안개가 심하게 끼는 날을 예측하여 10만개의 화살을 공짜로 받아낸다. 아울러 적벽대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동남풍까지 불도록 하니 기문둔갑의 활용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가 된다.

 

혹자는 제갈량이 그 근처에 오래 살면서 겨울에도 가끔 동남풍이 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야기 한다. 혹은 조직을 동원해 그곳에 오래 살던 사람들로부터 동남풍이 부는 경험적 데이터를 얻은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첫번째 폄하는 가끔 분다는 걸 알아도 목숨을 걸고 날짜를 맞춰가며 바람을 불게 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 당시에 데이터 획득 인프라를 너무 과하게 포장한 것이다. (뚠자는 제갈량에게 너무 후하다)

 

제갈량의 기문둔갑을 이용한 미래 예측은 적벽대전 이후에도 유비가 연하의 손부인을 맞아들이며 겪는 위기를 잘 넘도록 안배해 둔 금낭3계에서도 발휘된다.

 

이후 삼국지 3대 대전의 마지막인 이릉대전에서도 나타난다. 유비가 육손에게 호되게 피하고 도망가자 육손이 유비를 잡고자 추격을 해 온다. 그때 제갈량이 언제 미리 만들어 두었는지,  돌무더기가  팔진도를 이루며 배치된 곳에 이르렀다. 짙은 안개와 음산한 요기 등에 가로막혀 육손은 거의 혼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다행이 때마침 지나가던 제갈량의 장인인 황석공이 나타나 육손을 구해주니 육손은 제갈량의 무서움을 깨닫고 더 이상 유비를 쫒지 않게 된다.

 

이처럼 기문둔갑의 흔적은 삼국지 소설 곳곳에 보인다. 나관중이 기문둔갑에 심취하였던지 아니면 정말 제갈량이 기문둔갑을 깊이 연구하여 그 활용을 극대화 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소설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제갈량은 기문둔갑을 극성까지 발전시켜 개인의 일반사 수준을 넘어서 집단 간의 전투 예측, 기상 예측, 나아가 요즘말로 부비트랩에까지 활용 했으니 그 능력이 실로 부럽기만 하다.

 

뚠자는 너무나 부러운나머지 잠깐 아주 잠깐 기문둔갑의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학문으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허나 그 이상의 적용 즉 생과사가 오락가락하는 전쟁터에서 전략 전술로 활용하는 수준까지는 뚠자에겐 너무 어려운 부분으로 여겨졌다.

 

역사상 우리 한반도에서도 기문둔갑을 극성으로 익혀 그 학문적 수준이 발생 본토인 중국을 넘어서는 위인이 있었다. 학문의 이름도 기문둔갑을 뛰어넘어 '홍연진결' 이라고 불렀던 분이 계시니 그분이 바로 화담 서경덕 선생님이다. 당시 최고의 미녀인 황진이가 그렇게 유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가지 않으셨다는 바로 그분 말이다. 참고로 뚠자는 아마 혹 했을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기문둔갑은 학문으로서의 깊이가 충분하다고 뚠자가 판단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1번씩 구경 해 봄직 할 것이다

728x9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 속 한 인물 - 사마의  (0) 2020.09.30
충무공 vs 충무공  (0) 2020.09.26
삼국지 - 주관적으로 보는 유비  (0) 2020.09.19
반성을 모르는 일본 - 역사 인식의 부재  (0) 2020.09.10
삼국지 3대전쟁 - 이릉대전  (0) 2020.09.04
Posted by ttoonza
,
728x90

대부분의 삼국지가 황건적의 난을 기술하며 시작한다. 아울러 유비가 등장하고 이어 그 유명한 도원결의가 이뤄진다. 따라서 삼국지의 주인공 중에서 단연 유비에 대한 언급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대부분 나관중 삼국지의 시각과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들 하지만 작가의 시각에 따라 상당한 주관적 평가도 따르게 마련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설민석의 삼국지'는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에 대해 상당히 후한 평가를 해 주었다. 20여년전에 읽은 '이문열의 삼국지'를 보면 굉장히 실용성을 중시하며 조조는 치켜 올리고 유비는 한없이 까 내린다. 이런 경향은 30여년 전에 읽은 '고우영의 삼국지'에서는 더욱 잘 나타나는데, 유비를 아예 '쪼다'로 부르기까지 한다.

 

작가의 원전 재해석은 나름의 시각이 반영되는 것이므로 읽는 재미가 있다 하겠다. 뚠자도 뚠자의 시각으로 유비를 표현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유비는 그저 시골의 돗자리 장수였다. 비록 황제의 먼 친척이라고 하지만 '중산정왕의 후예'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중산정왕의 아들만 120여명이라니 그 후예라고 해서 특별한 신분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니 집안 사정이야 뻔할 것이고 그래서 돗자리짜며 연명했을 것이다.

 

그런 유비가 후에 3분의 1만큼이긴 하지만,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자수성가한 입신 양명은 인정해 주어야 마땅하다. 동네 이장쯤에서 중국 전체를 거머쥔 한고조 유방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공적이라 뚠자는 생각한다.

 

흔히 유비는 민중의 아픔을 생각하며, 민중과 함께한 군주로 여겨진다. 제일 극명하게 표현된 곳이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유비 일행이 신야성을 나와 도망칠때 백성을 버리고 먼저 빨리 도망가자고 하는 말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백성과 함께 도망친 부분이다.

 

이 부분이 진심이었던 의도적이었던 유비는 민심과 함께 한다는 결정적 대중 지지도를 갖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부인 하나가 죽고, 갖 나은 아들마저도 별거 아니라는 듯 내동댕이 치며 조자룡의 안위를 걱정함에 대중의 지지도 상승도 상승이지만, 적극적 지지자인 부하들의 충성심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게 된다.

 

'아! 저런 사람의 부하구나 우리는...' 하는 생각을 갖는 부하는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다.

 

따라서 뚠자의 입장에서는 조조만큼의 업적은 안되니 별 볼일 없다거나 심하게 '쪼다'로 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유비는 유비만이 가진 캐릭터적 매력으로 대중의 지지도와 열성 부하들의 자발적 충성 지원덕에 무명의 돗자리 장수에서 황제의 반열로 간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로 이름을 남겼으니 말이다.

 

뚠자는 유비의 덕망이 부러울 따름이다.

728x9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무공 vs 충무공  (0) 2020.09.26
제갈량의 학문 - 기문둔갑  (0) 2020.09.20
반성을 모르는 일본 - 역사 인식의 부재  (0) 2020.09.10
삼국지 3대전쟁 - 이릉대전  (0) 2020.09.04
삼국지 3대전쟁 - 적벽대전  (0) 2020.08.28
Posted by ttoonza
,
728x90

역사 인식의 부재를 일본인 스스로 다룬 책

매번 일본 총리의 망언이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뉴스에 보도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과 일본군의 행동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이뤄지지 않는점도 독일과 비교되며  뉴스거리가 되어왔다.

 

도대체 왜 그럴까?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침략하여 물자를 수탈하고, 남자는 군대와 일터로 끌고가서 노동력을 강제 착취하고, 여자에게는 일본군의 노리개로 성적 착취까지 했으며, 국가적 명맥을 영원히 절단시키고자 각 지역의 혈(맥을 짚는 자리)자리에 쇠말뚝까지 박았다.

 

그러면서도 못사는 미개한 나라를 개화시키는 옳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며 뻔뻔스럽게 모든 악행을 부정하는 그 근본적 이유는 무엇인가? 뚠자는 그것이 궁금하였다. (쟤들은 도대체 안배우는 거야? 그렇다. 그들은 배우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를 나름 고민하다 잊어먹다를 반복하며 지내다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일본인이 지은 낡은 책을 한권 보게되었다.

책의 제목은 '전후 일본의 역사 문제'라고 하며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역사 교과서 집필진이기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의 역사학자가 전후 일본 내부의 수습 과정에서 일이난 일들을 토대로, 일본의 역사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나름 균형을 가지고 비교적 양심적인 시각으로 정리한 책이어서 약간의 이해가 되었기에 몇자 적어본다.


먼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1945년을 상기해보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 시민들로서의 일본 국민들의 목소리는 아주 약했다. 일부 엘리트 집단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주도적으로 아시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진행되었고, 일본 일반인들은 전쟁에 내몰렸다. 이런 엘리트층의 권력 장악 상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대로 이이졌다. 

 

수많은 국민이 죽고 재산상의 손실이 발생했으며, 국제적으로도 많은 국가에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전쟁 책임이 있는 엘리트층에 대한 적절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트층 위주의 전후 정치 세력의 재등장 아니 굳건함은 A급 전범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장되어 추모를 받고, 강제 징집되어 전쟁에 끌려가 희생당한 일반인 유족들과 동등한 예우를 받으며 유족 보상까지 받게 되없다.

 

이처럼 전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그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선대가 주도했던 전쟁에 대해 미화 작업을 주도한다. (당장에 아베 신조만 해도 그렇다. 아베의 외할아버지가 A급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 꿋꿋하게 일본의 수상을 지냈다. 그런 아베는 외할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 영광을 재연하고 싶어한 것이다.)


아시아 각 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대동아 공영'을 위한 전쟁이라고 미화하는 말은 전쟁 당시에도 이미 슬로건이었지만 전후에 본격적으로 아주 그럴듯하게 자기 쇄뇌용으로 사용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전쟁 주도세력과 강제 징집자들을 함께 묶어 순국열사로 추앙하니 마치 우리나라 현충원에 순국선열과 친일파들을 함께 매장한 것과 같은 형국인 것이다.

 

갈수록 도를 넘어서는 역사 교과서 내용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쟁에 대한 내용을 역사 교과서에 기술하면서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전쟁에 나가 싸운 이들이 모두 영웅들이었다고 묘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이유가 가관인것이 향후 국가의 운명을 짊어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국가의 진취성에 대해 밝은 방향으로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란다.

 

전쟁을 일으켰던 내용을 잘못이라거나 피해 입은 아시아 각 나라 민족에게 사죄만 반복하는 어두운 역사관을 배우게 할 수는 없단다. 그러니 강제 징용공, 강제 위안부 같은 내용조차도 슬그머니 사라져가고 있다. 말만으로는 그럴듯한데, 어두운 과거를 모르고 자라난 세대들은 과거를 배우며 자란 옆나라 세대들과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당연히 주변국(중국, 한국 등)들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 강한 반발을 갖게 된다. 여기에 더해, 2차세계대전 이후 전후처리를 주도한 미국은 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우처럼 과도한 전쟁 보상 요구가 일본으로 하여금 다시 전쟁으로 내모는 사태로 이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적은 보상만으로 전쟁비용 청구를 매듭짓는다.

 

(사실 오키나와 전투처럼 일본군의 무모하지만 모두가 옥쇄를 외치며 죽음으로 패전을 거부하는 상황에 미군도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 원폭이 아니었다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를 만큼 미국도 몸서리 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무단 강제 점령했던 영토나 부속도서들에 대한 명확한 원래 국가로의 반환을 명문화하여 남기지 않은 까닭에 현제까지도 러시아, 중국, 한국 등과 영토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시도때도 없이 독도를 일본땅이라 우기는 이 말도 안되는 사안의 발단은 패전국 일본에 명확한 책임을 지우지 않은 미국에게도 일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궁핍함을 유지했어야 국민들의 원망이 책임론까기 진행되었을 것인데, 갑작스런 6·25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의 군수품 조달처로 급성장하며 경제적 도약의 기회를 잡게 되니 모든 사회적 불만을 경제 부흥으로 막을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김일성의 과욕이 일본만 좋게 만든 꼴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제 강점 상태에서 벗어난 이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단죄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른 것과 같이 일본내에서도 전쟁 주도 세력의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또한 제국주의 시대의 엘리트층은 철저한 자기 반성없이 슬그머니 다시 권력을 유지하게 되며 오늘날의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형성 된 것이다.

 

권력을 잡은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할 수 없기에 했던 사과조차도 번복하며 본인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도 친일파와 관련해서 비슷한 상황이라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저들의 악행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동족도 아니며, 그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정당한 댓가를 치르도록 해야 하지않나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www.youtube.com/watch?v=8sD0pi99xas

728x90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갈량의 학문 - 기문둔갑  (0) 2020.09.20
삼국지 - 주관적으로 보는 유비  (0) 2020.09.19
삼국지 3대전쟁 - 이릉대전  (0) 2020.09.04
삼국지 3대전쟁 - 적벽대전  (0) 2020.08.28
삼국지 3대전쟁 - 관도대전  (0) 2020.08.22
Posted by ttoonza
,
728x90

이릉대전, 삼국지에 등장하는 최대규모의 전쟁중 관도대전, 적벽대전에 이은 3번째 전쟁이다.

관우의 죽음이후,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긁어모아 손권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손권측에서는 여몽의 급사(갑작스런 죽음)로 인해, 젊은 육손이 대장에 임명되어 싸움에 임하게 되니 촉에서는 유비가 오에서는 육손이 전쟁을 진두 지휘하는 형국이다.

 

초반의 기세는 복수심에 불타는 촉군에 유리하였으나, 지루할 정도로 침착한 육손의 대응에 차츰 예리함이 무뎌진 촉군은 한여름 더운날씨에 시원한 숲속으로 군영을 옮기며 더위를 피하려 한다.

 

그러자 지금까지 일부러 후퇴를 거듭하며 기회를 노리고있던 육손은 화공으로 숲에 불을 질러 100만 대군 유비군을 거의다 불에 태워 죽인다.

 

유비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울화병에 걸렸고, 만류하던 제갈량을 만나볼 염치가 없어 상당기간을 접경지대인 백제성에서 머물다가 죽고만다.

 

이 싸움이 갖는 의미는 적벽대전 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한다. 적벽대전이 잘나가던 조조의 위세가 꺾이며 유비의 상승세를 이끌어냈다면, 이 이릉대전은 잘나가던 유비군이 대규모 병력 손실과 함께 확장의 기세가 꺾였다는 점이다.

 

조금 더 참고 그 병력을 더욱 조련하여 먼저 동오와 연합하여 다시 한번 위와 결전을 벌였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울러 이 전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 초반의 주인공인 유관장 의형제들이 모두 죽으면서 1세대들의 퇴진이 가속화되고, 제갈량, 사마의 등 2세대들의 전면적 등장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삼국지 3대 전쟁을 모두 살펴보았다. 공교롭게도 모두 불에 의해 결정적 전투에서 승부가 갈렸으며, 모두 수비하는 입장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역시 공격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NCO1tHWsg

728x90
Posted by ttoonza
,
728x90

삼국지를 읽다보면 무척 많은 전쟁들이 나온다. 황건적과의 전쟁, 동탁 vs 연합군의 전쟁, 원소 vs 조조의 전쟁등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흥이나며 제갈량의 가세로 각국의 참모가 초절정 상태의 지략 대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적벽대전은 가히 원탑으로 불릴만한 전쟁일 것이다.

 

특히 특히 형주를 거점으로 하며 조조군과 맞써 싸울 상황도 될법했던 유비가 군자의 길을 걷는 바람에 조조는 너무나 손쉽게 형주를 차지한다. 여기서 다들 유비를 쪼다라고 한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안전을 확보하고 민심을 수습하며 자신에게 충성할 군대를 만들기에는시간이 너무 부복한 것이었다. 조조가 기다려 준다던가? 유비도 나름 멀리 한수 내다 본 결정이었으리라. 거기다 명분도 있지 않은가? 형제의 땅을 취할 순 없노라....ㅋ

 

그러니, 조조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싸움없이 형주까지 차지하고 보니 내친김에 천하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장강이 최대 장벽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내버려 둘수만도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진행 국면을 들여다보면, 조조 vs 유,손 연합 대결보다는 오히려 제갈량과 주유의 대결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천하를 노리는 유, 손 두 진영의 최고 수뇌부의 지략 대결은 적벽대전 서막부터, 전쟁 후 주유가 죽을때까지 이어진다.

 

초반에 제갈량의 동오를 방문하면서 주유는 제갈량을 떠보려하지만, 오히려 주유 부인을 들먹이는 제갈량의 심리전에 말려들어 흥분하며 선수를 빼앗긴다. 이후, 화살 10만개, 동남풍 사건, 형주 장악, 유비와 손상향의 결혼 등 모든 부분에서 주유는 제갈량에게 매번 당하고 만다. (제갈량은 이와중에 또 다른 라이벌 관우를 완전히 제압한다.)

 

허풍과 과장이 있겠지만, 소설로만 대한다면 제갈량은 거의 신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므흣)

 

적벽대전에는 복룡봉추 중의 한명인 봉추 방통도 등장해 한몫하고 대기 모드로 들어간다. 장강은 중국에서 항하와 더불어 어마어마하게 큰 강이다. 이곳에 육지에서만 싸움하던 병사들이 물결의 흔들림에 중심을 못잡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조조군을 아무 의심없이 배를 서로 묶어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고 설득한 이가 바로 방통이었다. 이후 방통은 의외로 동오에서 크게 대접을 못받게되자 유비를 찾게 된다.

 

아무튼 전쟁은 벌어졌고, 적벽에서 조조는 대패하고 그 기세가 꺽인다. 조조의 생애에서 천하통일은 물 건너 갔음을 조조도 느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전쟁으로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며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특히 내실있는 행정을 바탕으로 인물을 정비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추가로 서촉까지도 얻게된다. 유비 세력이 국가급으로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 배경은 적벽대전이었다.

 

한편 전쟁을 압도적 대승으로 마무리지었으나 결과적으로 얻은게 없는 손권측은 상대적 박탈을 느끼며 형주를 차지한 유비가 배아픈 상대가 된다. 틈만 나면 유비가 차지한 형주를 노리게 되며, 둘 사이에는 협력하기 어려운 보이지않는 틈이 생기게 된다. 이는 삼국지 3대전쟁의 마지막인 이릉대전의 불씨가 된다.

 

다음 동영상은 뚠자가 아들 뚠뚠이와 적벽대전에 대해 나눈 이야기입니다.

PPT로 자료를 보면서 이야기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6DYakURfMc

728x90
Posted by ttoonza
,
728x90

삼국지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나오지만, 가장 큰 3개의 전쟁이 있는데, 그 중 첫번째가 관도대전이다. 관도대전의 수장은 조조와 원소다.

 

사실 삼국지하면 조조의 라이벌 유비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이다. 조조가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조조와 원소는 절친사이였다. 당시부터 조조는 원소가 죽을때까지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했음이 기록 곳곳에 묻어나온다.

 

사실 원소는 명문가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서자중에서도 가장 출신이 약한 노비 출신이었다. (어머니가 노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 사회의 강력한 지침인 효를 몸으로 보여주며(6년상) 정식으로 가문에 입적함과 동시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게된다.

 

요즘말로 정치적 프레임 작업은 거의 환상적이다. 실제로 조조는 황제를 겁박하고 권력을 남용하기 때문에 이에 맞서야한다는 명분을 유비나 손권조차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니 원소가 정적에 대해서는 얼마나 정치적으로 잘 대처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조와 원소는 패권 경쟁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명분상 서로 황권을 이용한 것이다.

 

조조는 현 황제의 황권을 대리하고 있었으며, 원소는 핍박받는 황제를 구출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사실 원소의 세력은 실로 막강하였다. 조조 조차도 관도대전에 이기고서도 원소를 끝장내려고 덤비기 보다는 오히려 수비하기에 급급한 모양이었으니...

 

사실 원소도 관도대전에서 패한 이후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어 조조와 대결을 예고하였으나 급사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조측에서는 교묘하게 원소의 후계구도의 헛점을 파고들어 원소의 본거지를 차지하고 전열을 더욱 가다듬는다.

 

만약 원소가 조금 더 오래 살면서 전력으로 조조와 상대해 이겼더라면 삼국지의 주인공이 바뀌었으려나...

 

관도대전의 실제 내용은 책을 읽어서 확인들하시라.

 

원소의 자기 사람들에 대해 똥볼을 차는 모습이나, 위기의 상황에서 단 1번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낚아챈 조조의 싸움이 관도대전의 결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ZjqT7zy6s

728x90
Posted by ttoonza
,
728x90

 

제갈량과 사마의

앞서 군주들의 천하를 다투는 라이벌 관계를 보았는데, 그들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지략대결도 불꽃튀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삼국지 중후반부를 혼자서 이끌어가다시피 하는 제갈량에게는 상황 상황에 맞게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다.

 

처음에는 관우가, 다음에는 주유가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사마의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관우는 화용도 사건으로 완전히 휘어잡았고, 주유는 수차례에 걸친 지략 대결에서 차원이 다른 한마디로 클래스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완승한다.

 

오죽하면 주유가 제갈량의 지략에 탄복하며 하늘을 원망하며 죽었을까...

 

하지만 마지막 그로기 상태까지 몰고 갔지만, 정작 KO를 시키지 못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사마의다. 사마의도 제갈량 못지않게 지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실전에서의 경험이 제갈량에 못미쳐 한두번 우왕좌왕 했으나, 버티기 신공으로 끝내 살아남음은 물론이오, 손자로 하여금 대업을 이루게하는 발판을 마련해준다.

 

10여세부터 줄곧 제갈량만 제일로 치며 살아왔으나, 50줄에 들어서 중국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를 본 이후 사마의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가문(부모부터 형제와 자식까지)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조씨가문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내용을 보니 심계의 깊음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특히 가문의 흥망을 걸고 초반 대천재 양수와의 싸움은 정말 대단한 가문들의 열전이었다고 본다.

 

한편, 유비는 수경선생 사마휘로부터 '복룡 봉추 둘중에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다툴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 복룡이라는 제갈량을 얻은 이후 봉추인 방통까지 얻게 되니, 당시 책을 읽을때는 당장에라도 유비가 천하통일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정한 제갈량의 라이벌로 유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줄 알았던 방통은 너무 쉽게 죽는다. 만약 방통이 살아서 제갈량과 같이 각1군씩을 거느렸다면, 사마의가 당해내지 못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MlQf44DmQ5E

728x90
Posted by ttoonza
,